무선을 다시 생각하기
블루투스. 여러분이 이 기술을 처음 들어본 것은 언제쯤인가? 아마 대부분 스마트폰으로 넘어오고 나서가 아닐까 생각되는데, 사실 블루투스는 굉장히 오래된 기술이다. 1994년에 처음 개발됐으며, 발표는 1999년에 이뤄졌다. 2000년대 초반에는 이미 휴대전화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문근영이 광고하던 애니콜 블루블랙폰이 국내 휴대전화에서는 최초로 블루투스를 탑재한 경우인데, 이게 2005년의 일이다.
처음의 블루투스는 연결 범위도 짧았고, 안정성도 별로였으며, 데이터 전송 속도도 매우 느렸고, 무엇보다 배터리를 많이 먹었다. 다행히도 다음 10년 동안 기술은 발전했고, 이 문제들은 대부분 웬만큼 개선됐다. 하지만 아직 딱 하나 해결되지 않은 것이 있었으니, 바로 연결 방법이었다. 블루투스 기기의 연결 과정은 '페어링'이라고 하는데, 이 단어의 어원인 영단어 'Pair'라는 단어가 암시하듯이 블루투스 기기를 1:1로 연결하는 방식이다. 문제는 블루투스를 사용하는 기기들이 많아지면서 발생하게 되는데, 하나의 이어폰을 다양한 기기들에 연결하려면 원래 연결을 끊고 다른 기기로 다시 페어링을 해야 한다. 이 과정을 그나마 좀 쉽게 해주는 (이른바 '멀티페어링'이라 불리는) 기기들도 등장하긴 했지만, 기기 자체에 스위치를 달거나 전용 앱을 이용하는 경우인 만큼 한계가 어느 정도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애플이 이어폰 단자가 없는 아이폰 7을 내놓으면서 같이 발표한 에어팟은 이 문제를 인지하고 재밌는 방법으로 해결한다. 전통적인 기술의 문제를 보고 해결하는 오랜만에 보는 전형적 애플의 모습이다. 그 덕분에 에어팟은 2016년에 애플이 내놓은 제품 중 가장 혁신적인 제품이라고 할 만하다.
디자인
에어팟의 디자인은 지난 2012년부터 아이폰과 아이팟의 번들 이어폰으로 자리 잡은 이어팟에 기반하고 있다. 차이점은 어느 정도 존재하는데, 일단 기둥 부분에 배터리가 들어가면서 이어팟보다 두꺼운 편이고, 다양한 센서가 추가되면서 소리를 내기 위해 필요한 공기 통로 위치가 조금씩 달라졌다. 하지만 귀에 꽂는 이어버드 부분의 모양이나 크기는 이어팟과 완전히 같다. 따라서, 이어팟이 잘 맞는 사람이라면, 에어팟도 문제없이 맞는다.
그럼 여기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부분이 하나 있다. 과연 잘 떨어질까? 에어팟을 처음으로 끼워보면 워낙 가벼운 무게 때문에 이어폰이 살짝 귀 안에서 뜬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 느낌 때문에 떨어지는 것은 아닌지 불안할 수밖에 없는데, 실제로는 생각외로 잘 안 떨어진다. 내가 에어팟을 낀 상태로 전력질주까지 해봤지만, 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퇴근길 2호선에서 몸싸움(...)을 하는 와중에도 떨어지지 않았다. 해외에는 심지어 10km 마라톤을 뛰었는데도 떨어지지 않았다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어팟의 경우, 줄이 아래로 끌어내리는 힘이 강해서 조금이라도 맞지 않으면 잘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에어팟은 이 줄이 없기 때문에 생각보다 잘 안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어팟에 줄의 유무에 따라 얼마나 달라지는지는 이 분이 직접 증명해주신다) 그래서 이어팟이 잘 안 맞는다고 생각하더라도 오히려 에어팟이 맞을 수도 있다. 한 번 착용해보고 결정하는 것이 좋다. 아, 그리고 긴 머리를 가진 사람의 경우 머리카락에 걸려서 떨어져나가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참고하도록 하자. 그리고 오히려 귀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보다 케이스에 넣다가 놓쳐서 떨어뜨리는 경우가 더 많다. 애플에서도 이러한 우려(?)를 인지하고 iOS 10.3부터 ‘내 에어팟 찾기’ 기능을 넣을 예정이다.
에어팟은 공기 통로 외에도 검은 점이 몇 개 있는데, 이 부분은 모두 근접 센서다. 에어팟이 귀에 제대로 들어가있는지 확인하는 역할이다. 이 센서 덕분에 에어팟은 귀에서 한 쪽이 빠져나가면 자동으로 음악을 일시 정지할 수 있다. 그리고 두 번 탭 제스처를 감지할 수 있는 가속도 센서도 내장돼 있다.
실제로 착용한 샷을 보도록 하자. 솔직히 말해서, 생각보다 나쁘진 않다. 앞에서 보면 사람의 얼굴형에 따라 에어팟이 가려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분명히 이거보단 더 나은 디자인이 존재하긴 한다. 게다가 배터리를 넣느라고 기둥 부분이 두꺼워지면서 이어팟보다 더 눈에 잘 띄기도 한다. 어느 분은 멀리서 나를 처음 봤음에도 불구하고 에어팟을 낀 걸 보고 나인 줄 알았다고 했을 정도였으니까.
에어팟을 보관하는 케이스는 치실 케이스와 닮았다는 코멘트가 많은데, 실제로 보면 치실보다 더 작다. 위의 아이폰 7 플러스와 비교한 사진만 봐도 알 수 있다. 케이스의 덮개는 맥북의 덮개처럼 끝에 자석이 있어서 살짝만 밀어줘도 경쾌한 소리와 함께 닫힌다. 에어팟과의 연결도 자석으로 이루어져서 케이스 덮개를 연 상태로 거꾸로 흔들어도 떨어지지 않는다. 케이스 안에는 배터리가 내장돼 끝의 접촉부를 통해 에어팟을 충전한다. 사실상 에어팟을 충전하려면 이 케이스는 필수이며, 사용하지 않을 때 보관하기에도 좋다. 단점이라면 표면에 잔 흠집이 많이 나는 편이고 케이스 덮개 경첩 부분에는 먼지가 좀 낀다는 것 정도겠다.
케이스에 꽂은 에어팟은 15분 충전으로 3시간(약 60% 정도)을 더 들을 수 있다고 애플은 말한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지만 실제로 에어팟의 충전 속도는 놀랍도록 빠른 편이다. 잠깐만 넣어놓고 있었는데도 이미 100%를 찍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케이스 자체는 라이트닝 케이블로 충전되는데, 케이스의 충전 속도는 에어팟 본체만큼 경이롭게 빠르진 않은 편이다.
연결
에어팟의 연결 방법은 매우 애플답다. 처음에 뜯은 에어팟의 케이스를 열면 iOS 10 이상의 iOS 기기(아이폰, 아이패드)에서 팝업이 뜬다. 그리고 연결 버튼을 누르는 순간 바로 페어링이 완료된다. 여기에 같은 아이클라우드 계정으로 묶여 있는 애플 기기들(iOS 기기뿐만 아니라 애플 워치, 맥까지. 모두 최신 버전이 설치돼있어야 한다)에도 에어팟이 자동으로 등록된다.
어느 기기에서 에어팟으로 오디오를 보낼지 결정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iOS에서는 제어 센터에서 오디오를 바꿔주면 되고, 맥에서는 블루투스 메뉴에서 에어팟을 선택해 연결하면 된다. 물론 이 프로세스가 자동화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있다. 특히 맥이 잠을 자고 있는 상태라면 이걸 인식해서 자동으로 아이폰으로 바꿔주면 좋겠다. (맥이 자고 있더라도 블루투스는 켜져 있기 때문에 에어팟이 그냥 맥에 연결해버린다)
에어팟은 본질적으로 블루투스 이어폰이기 때문에 이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연결하는 것은 가능하다. 즉, iOS 10 이전의 아이폰이나 구형 맥, 그리고 안드로이드폰과 같은 비애플 기기에서도 에어팟을 연결할 수 있다.
한쪽만 꺼내서 듣는 것도 가능한데, 이때는 다른 한쪽은 케이스에 넣어두면 된다. 그러면 자동으로 모노 이어폰으로 전환된다. 이때 각각 배터리 상태를 따로 보여준다. 케이스 자체에는 블루투스 안테나가 없기 때문에 배터리 상태는 에어팟이 꽂혀있을 때에만 보여준다.
연결 안정성은 대체로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연결을 유지하는 거리도 꽤 길고,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끊김 없이 소리를 전달했다. 그러나 수많은 신호가 오가는 서울 지하철 안에서는 신호 간섭으로 인해 간헐적인 끊김 현상이 있기도 하다. 어쩔 수 없는 증상인 듯하다. (그런 신호가 훨씬 덜한 미국에서는 끊김 현상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리고 대체적으로 아이폰 7 플러스보다는 2016년형 맥북 프로에서 끊김 현상이 덜했다.
소리
나는 개인적으로 이어팟의 소리를 매우 좋아한다. 전체적으로 밸런스가 잘 잡혀있어서 웬만한 장르 모두를 괜찮게 소화해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어팟은 가성비가 꽤 괜찮은 번들 이어폰으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다행히도, 에어팟은 이어팟과 비슷한 소리를 낸다. 살짝 저음역이 강화된 것 같지만, 크게 신경 쓰이는 정도는 아니다. 음량도 오픈형임을 감안하면 꽤 큰 사운드를 낸다. 보통 블루투스 이어폰은 아이폰에서 볼륨을 75% 정도로 설정해놓곤 하는데, 에어팟은 50% 정도로만 해둬도 충분했다. 물론 오디오 마니아의 귀에는 너무 무난한 점이 단점이 될 수는 있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에어팟의 오디오 성능에서는 불평할 것이 없다.
마이크 성능도 꽤 출중한 편이다. 목소리의 방향을 인식해 증폭시키는 빔포밍 형식의 이 마이크는 얼굴 바로 옆에 붙어있는 덕에 사용자의 목소리를 잘 잡아낸다.
배터리
애플은 에어팟 본체의 배터리 시간을 5시간 정도, 케이스에 내장된 배터리까지 합하면 총 24시간 정도로 밝히고 있다. 자체 테스트에서 에어팟은 딱 애플이 말한 대로의 배터리 시간을 보였다. 아무래도 논란이 많은 맥북 프로와 달리 기능이 단순하 다 니 좀 더 일관적인 결과를 보이는 듯하다. (참고로 음성 통화시에는 2시간 정도, 케이스까지 합하면 11시간 정도다)
5시간이 충분하지 않은 거 같다는 의견이 있기도 한데, 일단 5시간 동안 내내 음악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듣지 않을 때마다 케이스에 넣어두면 알아서 충전도 된다. 위에서 언급한 엄청난 속도로. 케이스까지 합하면 내가 한국에서 쓰는 평균적인 사용 패턴(집이 서울 중심가에서 멀다 보니 꽤나 긴 이동 시간 동안 사용)에서 3~4일은 버텨준다. 학교를 다닐 때는 듣는 시간이 더욱 짧아지니 잘만 하면 1주일도 버틸 수 있을 거 같다.
시리
나랑 비슷한 시기에 에어팟을 구매한 내 친구는 이어팟과 다르게 재생이나 볼륨 조정 등을 할 수 있는 리모컨이 사라진 점이 제일 아쉽다고 꼽았다. 애플은 이것을 모두 시리로 해결하려고 하고 있다.
에어팟을 두 번 탭 하면 시리가 알아서 켜진다. (터치 센서가 아닌, 톡톡 건드릴 때의 움직임을 가속도 센서가 인식하는 방식이다) 시리의 인식률은 늘 많은 사람들의 조롱거리 중 하나인데, 에어팟은 빔포밍 마이크 덕에 아이폰이나 애플 워치보다 시리 인식률이 월등히 뛰어나다. 그리고 에어팟에 특화된 제어도 할 수 있는데, 볼륨 조정("볼륨 20% 줄여줘")이나 에어팟의 배터리 잔량 확인("에어팟 배터리가 얼마나 남았지?") 등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하드웨어 버튼을 완전히 음성 명령으로 대체하기에는 아직 일러 보이는 것이 사실이긴 하다. 일단, 아무리 마이크가 가까워서 인식률이 좋아졌다 하더라도, 여전히 버튼보다는 동작 속도나 정확도 면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사람들이 많은 한복판에서 이어폰에 대고 말하는 건 여전히 좀 부끄러운 일이기도 하고.
결론
에어팟이 이어폰 단자가 빠진 아이폰 7과 함께 나온 것은 최고이자 최악의 타이밍이었다. 안 그래도 이어폰 단자가 빠져서 좋지 않은 여론에 기름을 부어버린 격이었기도 했지만(거기에 2개월 가까이 판매가 밀려버리는 바람에 애매해지기도 했다), 애플은 에어팟이 완전 무선을 꿈꾸는 자신의 선언이 되기를 바랐고, 실제로 에어팟의 기능은 무선 이어폰이 가지고 있던 다양한 불편함을 해소하면서 일반 사람들이 무선 이어폰을 사용하기 훨씬 쉽도록 해준다.
에어팟은 애플이 작년에 내놓은 제품 중 가장 혁신적인 제품이라고 할 수 있다. (2016년에 나온 제품들을 최소한 1주일 이상은 써봤었으니 이런 말을 해도 되지 않을까?) 그리고 다양한 애플 제품들을 소유하고 있다면 한 번쯤은 구매를 고려해볼 만하다.
(사진 촬영에 협조해주신 디에디트 에디터H에게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애플 에어팟
타입: 무선 이어폰 가격: 219,000원 ($159)
장점
- 연결이 매우 편하다 (전부 애플 기기라면)
- 오래 가는 배터리와 케이스
- 균형잡힌 음질
단점
- 콩나물을 연상시키는 디자인
- 손에 잡을 때 놓칠 수도 있다
- 사고 싶어도 못 산다. (2017년 1월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