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삶의 품질의 향상
2016년 9월에 에어팟이 공개됐을 때, 첫인상은 좋지 않았다. 당장 애플의 마케팅 수석 부사장 필 쉴러는 에어팟 발표 5분 전에 “용기” 드립을 치면서 아이폰에서 이어폰 단자를 빼버리겠다고 한 참이었다. 그리고 에어팟의 모습을 처음으로 본 사람들은 머리를 손에 묻었다. 저것은 콩나물인가, 아니면 치실인가? 발표 직후 온갖 합성물이 나돌았고, 거기에 기존 10월에 출시 예정이었던 것이 12월로 밀리면서 여론은 더 안 좋아졌다.
하지만 12월에 에어팟이 판매되기 시작했을 때, 심상치 않았다. 미국에서 출시한 날에 동네 애플 스토어에 갔더니 무려 줄을 서 있었다. 직원도 “액세서리를 사려고 줄을 선 것은 처음 봤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곧 에어팟은 순식간에 동이 나면서 “6주팟”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지금 주문하면 늘 6주 뒤에나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2018년 4분기에는 무선 이어폰 시장의 60%를 차지했다. 출시 당시에는 조롱거리였던 그 디자인은 이제 하나의 지위적, 혹은 문화적 상징이 됐다. 15년 전의 하얀색 아이팟 이어버드가 그랬던 것처럼.
그로부터 2년이 지나, 새 에어팟이 공개됐다. 겉으로는 달라보이지도 않고, 음질도 똑같다. 하지만 1세대를 여태 쓰다가 갈아탄다면, 이런저런 소소한 개선들이 반가울 지도 모르겠다. 매일 끼고 다니는 것이 소소하게 기능을 개선한다면, 삶의 품질도 소소하게 향상되는 법이니까.
안 바뀐 것부터
여태까지의 리뷰 순서와 다르게, 이번 에어팟 리뷰는 안 바뀐 것들부터 나열해보고자 한다. 안 바뀐 것이 바뀐 줄 알고 기대하셨던 분들 먼저 읽어보고 돌아가시라는 나름의 작은 배려다.
디자인: 처음에 받았을 때 나도 정말 1세대랑 다른 게 하나도 없나 살펴봤다. 전반적인 크기나 디자인은 물론이고 근접 센서나 공기 통로의 위치까지 다 비교해봤지만, 차이점을 찾지는 못했다. 1세대와 2세대를 다 가지고 있다면 이어폰을 헷갈리는 일도 일어날 것 같다. (참고로, 다른 세대를 섞어쓸 수는 없다. 만약에 하나의 케이스에 섞어넣을 경우 iOS에서 재생할 수 없다고 경고창을 띄운다) 디자인이 똑같다는 건, 만약에 1세대가 귀에 맞지 않는다면, 2세대가 그걸 바꿔줄 가능성은 적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 분들에게는 얼마 전에 발표된 파워비츠 프로가 더 나은 옵션일 수도 있다. 충전 케이스도 만약에 무선 충전을 지원하지 않는 일반 케이스 버전(199,000원)을 샀다면 1세대와 똑같은 케이스다. 무선 충전 케이스에 대해서는 조금 이따가 얘기해보자.
음질: 애플은 1세대 에어팟과 2세대의 음질 차이는 없다고 밝혔다. (더 버지 리뷰 참고) 뭔가 다르다고 느낀다면 그건 어디까지 플라시보 효과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처음 1세대에서 업그레이드한 사용자들이 그렇게 느낄 만한 이유는 있다. 처음에 iOS 기기나 맥에 연결할 때의 연결 톤이 조금 깊은 저음을 가진 고음질 버전으로 교체된 것. 애플에서도 그런 플라시보 효과를 노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운드에서 바뀐 게 없다고 밝힌 걸 보면 후술할 H1 칩 덕분에 가능해진 것 같다. 에어팟의 음질에 관해서는 닥터몰라와 스튜디오51이 협력한 1세대의 정밀측정 결과를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스포일러: 동급에서는 최고 수준이라고 한다)
전반적인 사용법: 처음에 뚜껑을 열어 iOS 기기에 연결하는 과정은 똑같다. 양쪽 에어팟의 더블 탭을 다른 기능으로 설정하는 것도 똑같다. (“시리야” 기능 추가 덕분에 2세대 에어팟의 기본 세팅은 다음 트랙 넘기기로 돼 있다) 갤럭시 버즈처럼 터치 패널이 들어갔다거나 그렇지는 않다.
이렇게 안 바뀐 것을 전부 정리해보았다. 그럼 이제 바뀐 것을 볼 차례다.
H1
에어팟은 애플이 처음으로 자체 개발한 블루투스 제어 칩인 W1을 썼다. iOS 기기에 뜨는 팝업 메뉴나 아이클라우드 계정을 통한 기기 전환, 그리고 기존 무선 이어폰보다 더 안정적인 무선 성능이나 배터리 등이 모두 이 W1 덕분이었다.
2세대 에어팟은 여기서 진보한 H1 칩을 쓴다. “H”는 “헤드폰(Headphones)”을 의미한다. 즉, 블루투스 헤드폰 전용 칩셋인 셈이다. 그 의미에 걸맞게, H1 칩은 무선 이어폰에게 중요한 무선 성능의 개선을 꾀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연결 속도를 꼽을 수 있다. 애플은 아이폰과 맥, 아이패드, 애플 워치 등의 애플 기기간 연결 전환시 연결 속도가 최대 2배 향상됐다고 설명한다. 이 부분은 딱히 따로 스톱워치로 측정하지 않더라도 그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예전에는 아이폰에서 맥으로 전환하려면 꽤 오랜 시간 동안 “연결 중” 애니메이션을 쳐다보고 있어야 했는데, 2세대에서는 거의 누르자마자 연결된다. 에어팟을 아이폰하고만 연결한다면 그 차이를 느끼는 것이 어렵지만, 만약에 아이패드나 맥 등 사과농장 하나를 운영하고 있다면 그 소소한 차이가 꽤 크게 다가온다. 아쉽게도, 동시에 여러 대의 기기에 연결하는 “멀티 페어링”이나 1세대 리뷰에서 내가 언급했던 기기가 잠든 것을 자동으로 알고 다른 기기로 연결을 전환하는 기능은 여전히 없다.
애플이 말한 부분은 아니지만, 전반적인 연결 안정성도 H1 덕분에 크게 개선됐다. 내가 자주 다니는 뉴욕의 금융가(월 가 근처)는 걸어다니면서 에어팟으로 음악이나 팟캐스트를 들으면 끊기는 일이 꽤 많은 지역이다. 블루투스가 쓰는 2.4GHz 주파수 대역이 워낙 쓰이는 곳이 많아서 (대표적으로 아직도 많이 쓰이는 옛날 와이파이 표준이 2.4GHz 대역이었다) 그러리라. 하지만 2세대 에어팟을 이 구간에서 테스트해본 결과, 연결이 끊김 없이 유지됐다. 물론 궁극의 테스트는 퇴근 시간대의 서울 지하철이 되겠지만, 일단 “뉴욕 월 가 테스트”에서는 합격점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그 외에도, 애플은 통화 전환 속도도 최대 50% 개선했다고 밝혔다. 정확히 말하면, 아이폰으로 전화를 받을 때 수화기에서 에어팟으로 전환할 때 걸리는 시간을 얘기한다. 최근에 에어팟으로 전화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난 것을 볼 때 꽤 환영할 만한 개선점이다. 특히 에어팟의 빔포밍 마이크는 수화기에 대고 말하는 것만큼 꽤 괜찮은 음질을 보장하며, 거기에 폰을 안 대고 있어도 된다는 장점이 더해지니까. 거기에 통화시 사용 시간도 1세대의 2시간에서 3시간으로 늘어난 점도 개선점이다.
시리야
H1 칩 덕분에 가능해진 또 다른 기능은 “시리야 (Hey Siri)”다. 예전에는 이어폰 한 쪽을 톡톡 쳐서 시리를 작동시켜야 했다. 어려운 건 아니었지만,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에서는 확실히 불리했다. 이 때 “시리야”라고 말을 하면 이제 에어팟이 듣고 아이폰으로 명령을 전송하게 된다. H1이 “시리야”라는 말을 먼저 들을 수 있도록 개선됐기에 가능한 것이다.
요즘 공유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나는 이 기능의 덕을 톡톡히 보곤 한다. 중간에 듣는 팟캐스트나 음악을 바꿀 때, 폰을 꺼내거나 애플 워치를 들 필요 없이 에어팟을 이용해 시리를 호출할 수 있게 됐다. 물론 아쉬운 점은 있는데, 말로 시리를 부르면 아이폰이나 맥처럼 작동음이 들리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명령을 내려놨는데 정작 알고보니 에어팟이 처음에 “시리야”를 못 들어서 아예 시리가 실행되지 않았던 경우도 이따금씩 있다. (맞바람에서 자전거를 타다보면 꽤 자주 발생한다) 에어팟으로 음악이나 팟캐스트를 들으며 빨래 타이머를 걸 때도 손목을 들어 워치를 들거나 폰을 볼 필요 없이 그냥 말만 하면 된다.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아이폰으로 에어팟이 연결된 상태에서도 애플 워치의 운동을 시리로 명령하려면 워치에 직접 말해야 한다는 점이다. 아이폰과 워치가 연결돼있음에도 불구하고 둘이 따로 동작하기 때문이다. 즉, 에어팟으로 워치 운동 명령을 내리려면 에어팟이 아이폰이 아닌 워치에 연결돼 있어야 한다. 이건 단순히 에어팟 문제라기보다는 아마 iOS와 watchOS가 서로 시리 명령을 통신하는 방식을 바꿔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iOS 12와 watchOS 5의 단축어 기능을 통해 애플 워치에서 아이폰에 있는 앱의 시리 단축어 명령을 동작시킬 수 있는데, 그 반대가 불가능해보이지는 않는다.
무선 충전
사실 2세대 에어팟의 핵심은 상술한 H1이지만, 많은 기존 에어팟 사용자들이 반기는 기능은 아마 무선 충전일 것이다. 사실 무선 충전은 2세대 에어팟만의 전유물도 아니다. 1세대 에어팟 사용자도 99,000원($79)짜리 무선 충전 케이스를 구매하면 된다.
무선 충전 케이스의 크기는 일반 케이스와 똑같다. 따라서 기존에 그 위에 케이스를 씌웠었다면 그대로 사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케이스가 적당히 얇으면서 금속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무선 충전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다.
무선 충전은 아이폰이 그렇듯이 치(Qi)를 사용한다. 아이폰에 쓰던 무선 충전패드 위에 올리면 똑같이 충전된다. 다만 무선 충전시 발열 문제 등으로 인해 최대 입력은 5W로 제한되므로 USB로 꽂는 것보다는 충전 시간이 상당히 오래 걸린다. (애플에 따르면, 완전 방전 상황에서 완충까지 약 3시간 반 정도 걸린다고 한다)
충전 상태를 표시하는 LED는 무선 충전을 할 때도 잘 보이도록 하기 위해 케이스 안에서 바깥으로 옮겼다. 다만 케이스 안에 있었을 때처럼 잠깐만 켜져 있다가 바로 꺼져서 이게 제대로 충전이 되고 있는지를 알기가 애매할 때도 있다. 충전 LED의 수명과 관련됐을 가능성도 있지만 내 생각엔 어차피 덮개를 닫으면 안 보이는 기존 케이스의 LED 로직을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로 보인다. 그리고 만약에 상술한대로 케이스를 씌운다면 당연히 LED는 가려지기 때문에 충전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 확인하는 유일한 방법은 케이스를 열어 iOS 기기로 배터리 상태를 확인하는 것뿐이다.
이러한 문제점들이 있다 하더라도, 에어팟이 무선 충전을 지원한다는 건 이미 아이폰 때문에 집부터 사무실까지 무선 충전기를 곳곳에 배치해둔 나에게는 큰 장점이 된다. 사무실에서는 예전 아이폰 X 리뷰 때 출연했던 캡틴 아메리카 충전기(옛날에 나온 녀석이라 얘도 5W 충전까지만 지원한다) 위에 올려서 충전하고, 집에서는 한 번에 최대 두 대를 충전할 수 있는 노매드의 베이스 스테이션에 아이폰과 함께 올려 충전하고 있다. 루머대로 다음 세대 아이폰이 쌍방향 무선 충전 기능을 지원한다면, 비상시에는 아이폰 위에 올려서 충전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지금 삼성 갤럭시 S10과 갤럭시 버즈의 조합을 보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수순인 거 같기도 하다. 거기에 애플 워치도 치를 지원하면 금상첨화일 거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해보자면, 아직 무선 충전을 지원하지 않는 구형 아이폰(7 이하)을 쓰는 사용자들에게는 크게 와닿지 않을 것이기도 하다. 그런 사용자들을 위해 기존 충전 케이스에 넣은 모델도 판매하는 것은 꽤 괜찮은 판매 전략으로 보인다. 가격을 좀 내렸으면 좋았겠지만…
아이폰 사용자의 필수품
1세대 에어팟 사용자에게서 “2세대 사야할까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당연히”라는 말을 하기는 좀 그렇다. 물론 H1이 원래 W1에 비해서는 엄청난 발전을 이뤄내긴 했지만, “시리야”를 제외하면 당장 사용자가 경험할 수 있는 새로운 기능은 적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이러한 조건을 단다.
“만약에 원래 쓰던 거 배터리가 다 죽어간다면.”
나도 2세대가 출시될 때쯤 원래 쓰던 1세대 에어팟의 배터리가 3시간을 가면 다행인 경우가 많았다. 2016년 12월에 출시되자마자, 혹은 2017년 초까지 기다려서 에어팟을 구매했다면 대부분이 이런 상황일 것이다. 워낙 작은 배터리인 데다가, 거의 매일 사용하다보니 배터리 수명이 훨씬 빠른 속도로, 그것도 눈에 띄는 속도로 줄어드는 것이다. 실제로 출근하면 내 아이폰은 무선 충전기 위에 놓여져 배터리를 충전하지만, 내 에어팟은 곧바로 맥으로 연결을 전환해 계속 사용된다. 이게 애플의 “계획된 구식화”라고 주장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물리학적 법칙이다.
사실 이미 에어팟을 가진 사용자들 중에 초기 구매자들을 제외하면 굳이 새 에어팟을 살 필요는 없다. 하지만 혹시나 여태까지 에어팟을 구매하지 않은 아이폰 사용자가 있다면, 특히나 아이폰 뿐만 아니라 맥이나 아이패드까지 같이 쓴다면, 에어팟은 애플이 제안하는 무선의 세계에 입문하기 가장 좋은 제품일 것이다.
아, 귀에 안 맞는 사람들은 제외하고. 만약에 그렇다면 파워비츠 프로가 더 맞을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