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에 새롭게 아이폰 SE가 공개됐습니다. 신형 SE는 "가성비 아이폰"이라는 1세대 SE의 유지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를 위해 지금까지 애플이 선보였던 다양한 기술들을 새롭게 조합합니다. 이미 선보인 기술들을 조합해 새로운 "보급형" 모델을 만드는 것은 10.2인치 아이패드 라인에서 볼 수 있듯이 최근의 애플이 가장 잘하는 것 중 하나이기도 하죠. 또한, 이번 SE와 같이 기존 기술을 조합하는 제품은 이미 시중에 나와있는 애플 제품들을 통해 어느 정도의 성능이 나오는지 짐작해볼 수도 있습니다.
그럼 이번 아이폰 SE에는 어느 제품에서 어느 기술을 가져왔을까요?
디자인과 디스플레이: 아이폰 8
가장 당연한 것부터 시작해볼까요. 아이폰 SE의 디자인은 2017년에 선보인 아이폰 8에서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아이폰 8의 전반적 폼 팩터는 2014년에 선보인 아이폰 6에서 이어져온 것입니다. 따라서, 대략 5년 반 정도 된 폼 팩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번 아이폰 SE가 2016년에 나온 1세대처럼 4인치 디자인이 아닌 점이 실망스럽다고 말합니다. 이해가 되는 부분이긴 합니다. 최근 들어 작은 스마트폰의 입지가 점점 좁아져온 것도 사실이고, 2세대의 4.7인치 크기가 최근 대중성이 있는 스마트폰 제조사에서 내놓은 스마트폰 중에 가장 작은 크기라는 점을 고려해보면 확실히 트렌드가 바뀌었음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애플도 월 스트리트 저널에게 "여태까지 4.7인치 아이폰을 총 5억 대 판매했다"라고 말하며 구체적인 수치까지 공개하는 것을 보면 애플 또한 이러한 스토리를 계속 푸시할 것으로 느껴집니다.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다른 뒷 사정도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애플이 이번 아이폰 SE를 위해 준비한 다양한 부품이 단순히 1세대의 4인치 폼 팩터 안에 넣기에는 자리가 부족했을 가능성입니다. 물론 전면적 부품 재설계를 했다면 어떻게든 끼워 맞췄겠지만, 그러면 개발비가 상당히 올라가면서 (애플 입장에선) SE의 가장 큰 판매 포인트인 가격을 못 맞췄을 가능성이 생깁니다. 거기에 마침 애플에게는 위와 같이 4.7인치 크기의 아이폰을 계속 팔 명분이 있었기에, 4인치를 포기하는 결정을 내렸던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입니다. 이 가설은 이후에 카메라에도 비슷하게 적용이 됩니다.
디스플레이도 아이폰 8의 것을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4.7인치의 1334x750 (326ppi) 디스플레이는 최대 625니트의 밝기를 지원하고, P3 색 영역을 지원하면서 돌비 비전과 HDR10 등의 HDR 규격도 제한적으로나마 지원합니다. 326ppi라는 픽셀 밀도는 요즘 시점에서 보면 경악할 수치이긴 하지만, 정작 보면 딱히 문제는 없을 겁니다. 두 배 가격인 아이폰 11도 여전히 326ppi 디스플레이를 쓰고 있기도 하고요.
어찌 됐든, SE의 폼 팩터가 지금 판매하는 아이폰 중에는 여전히 가장 작은 크기이므로 (화면뿐만 아니라, 물리적인 크기로도 아이폰 11 프로보다 약간 작습니다) "작은 4.7형 디자인"이라는 애플의 광고 문구는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의 전형적 예시입니다. 물론 4인치 디자인의 팬분들에게는 계속해서 명치에 펀치를 날리는 격이겠지만요.
AP: 아이폰 11 시리즈
개인적으로는 아이폰 SE 라인의 핵심이 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1세대 모델도 당시로서는 최신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인 A9를 썼었죠. 이번 SE 또한 아이폰 11 시리즈에 쓰이는 A13 바이오닉을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보통 보급형 스마트폰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생각하는 건 "성능이 떨어지는 AP를 쓰겠군"입니다. 실제로도 구글의 픽셀 3a나 삼성의 갤럭시 A 라인업이 취하는 전략이기도 하고요. 그렇다면 애플은 어떻게 아이폰 11의 반값인 SE에도 같은 AP를 넣는 짓을 해내는 것일까요?
이유는 애플이 사업을 굴리는 스케일 그 자체에 있습니다. 애플은 평균적으로 1년에 2억 대 정도의 아이폰을 판매합니다. 그리고 이 2억 대의 아이폰 중 대부분이 최신 모델로, 같은 AP를 사용합니다. 그만큼 많이 생산해내야 합니다. 그리고 많이 생산해낼수록, 당연히 부품당 단가는 떨어지게 됩니다. 거기다가 애플은 AP를 직접 개발합니다. 부품을 직접 개발하면 해당 부품을 계속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개발비 대비 매출 비율을 늘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애플은 A13의 단가를 낮춰내는 것입니다.
일례로 아이폰 SE와 같은 AP를 쓰는 아이폰 11 프로 맥스와 갤럭시 S20 울트라의 부품 단가를 비교한 TechInsights의 리포트를 한 번 보도록 하죠. 여기서 Application Processor 항목을 보면 A13 바이오닉의 단가가 64달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갤럭시 S20 울트라의 스냅드래곤 865는 81달러입니다. A13은 애플이 개발하고 대만의 TSMC에 위탁생산을 맡기는 형태이기 때문에 64달러라는 경우는 그 위탁생산을 통한 단가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삼성의 경우, 퀄컴에게서 스냅드래곤 865를 구매해야 합니다. 둘이 비슷한 성능을 낸다고 가정(하긴 어렵지만 그렇다고 치죠)하면, 추가된 17달러는 퀄컴이 개발비 등 자신의 기회비용을 추가로 얹는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17달러라는 비용이 크지는 않을 수 있지만, 이게 천만 대 단위로 나가기만 해도 1억 7천만 달러의 차이가 됩니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해보면, 직접 AP를 개발한다는 것 또한 초기 비용이 만만치 않습니다. 특히 애플의 경우 2012년의 A6부터 ARM 코어 디자인도 자체적으로 개발합니다. 이건 삼성 또한 엑시노스 M 디자인으로 시도했다가 결국 2019년에 포기한 부분입니다. 삼성은 굳이 이렇게 직접 코어를 개발한다고 한들 갤럭시 S20와 같은 플래그십 기종에만 사용할 것이기 때문에 개발비와 대비해 돌아오는 매출이 충분하지 않았고, 어찌어찌 개발된 엑시노스 M 코어는 삼성이 기대했던 차별화된 성능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퀄컴도 이번 스냅드래곤 865는 ARM의 표준 라이선스 디자인인 코어텍스 A77과 A55 기반으로 개발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애플의 사업 스케일은 여기서도 유리하게 작용합니다. 위에서 부품을 계속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개발비 대비 매출의 비율이 올라간다는 말을 했었는데, 애플은 애초에 워낙 여러 제품에서 같은 CPU 코어 디자인을 활용할 수 있다 보니 이 막대한 초기 개발비도 씹어버릴 수 있습니다. 일례로 애플은 A시리즈 AP를 현재 아이폰, 아이패드, 애플 TV, 홈팟에 사용하고 있고, 최근에는 다시 개발을 추진하고 있는 에어파워 무선 충전기의 발열 제어를 A11 바이오닉 AP로 할 거라는 루머가 돌기도 했습니다. 거기에, A시리즈에 사용된 코어는 애플 워치의 S시리즈나 최신 맥에 들어가는 T2 칩, 그리고 에어팟 시리즈에 들어가는 H1 칩의 기반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이 부분은 빠르면 내년 애플의 자체 AP를 사용하는 맥이 판매되기 시작하면 단가를 더욱 낮추는 요인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애플이 SE에도 최신 AP를 넣은 것은 SE를 구매할 소비자에게도 좋은 소식입니다. 그만큼 iOS의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도 오랫동안 지원할 수 있기 때문이죠. 애플은 AP의 성능이 받쳐주는 한에서 iOS 업데이트를 지원해줍니다. 지금 iOS 13은 A9를 탑재했던 아이폰 6s와 1세대 SE까지 지원하고 있죠. 이런 일례를 볼 때 SE도 4년 반에서 5년 정도는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카메라: 아이폰 8의 하드웨어 + 아이폰 11 시리즈의 소프트웨어
새로운 아이폰 SE의 카메라는 아마 이번 SE에서 가장 불확실한 부분 중 하나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새로운 조합인 점이 그 이유입니다.
처음에 발표됐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인물 사진 모드가 지원된다는 소식을 보며 작년에 나온 아이폰 XR의 카메라를 사용한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애플 쪽에서 밝힌 바로는 기존 아이폰 8의 카메라 하드웨어(센서+렌즈군)를 그대로 활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역시 디자인 부분에서 언급한 것처럼 8과 XR, 그리고 11의 카메라 하드웨어는 약간의 크기 차이가 있어서 그대로 넣기가 어렵지 않았을까 예상해봅니다.
하지만 이 부분 때문에 아이폰 8과 사진이 비슷하게 나올 거라 생각한다면 오해입니다. 디지털카메라의 화질에는 카메라 하드웨어가 다가 아니기 때문이죠. 특히 스마트폰이라면 센서가 읽은 화상 데이터를 소프트웨어로 다듬는 과정이 그만큼 중요해집니다. 아이폰에서는 보통 이 부분을 AP에 내장된 ISP, 즉 화상 신호 프로세서(Image Signal Processor)가 담당하는데요. 아이폰 SE에는 A13 바이오닉이 들어가기 때문에 당연히 A13의 ISP를 사용합니다.
그 덕분에 아이폰 SE는 8에서는 꿈꾸지 못했던 수준의 화상 처리가 가능합니다. 아이폰 11 시리즈에 탑재된 차세대 스마트 HDR을 사용하고, 센서에 잡히는 화상을 구역별로 나눠 머신 러닝으로 인식한 다음 인식하는 피사체의 종류에 따라 그에 알맞은 처리를 따로 적용하는 시맨틱 렌더링(Semantic Rendering)도 적용됐습니다. 거기에 4K 30fps까지는 확장된 계조로 영상 촬영을 할 수 있고, 위에 언급된 대로 하나짜리 카메라 하드웨어를 달고도 인물 사진 모드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XR이 그랬던 것처럼 사람의 얼굴을 인식해 배경 흐림을 적용하는 말 그대로의 "인물" 사진 모드입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의 결과물은 첫 리뷰들이 나오기 전까진 현재로선 애플이 올린 샘플 사진으로만 확인해볼 수 있는 상황입니다. 물론 애플의 샘플 사진은 후보정을 하지 않지만, 그래도 전문 사진작가들을 고용해 찍은 사진들을 매우 까다로운 과정을 통해 선별했을 것이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찍으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는 최소한 첫 리뷰들이 나오고, 다음 주에 1차 출시국에서 예약한 고객들이 받기 시작하면서 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개인적인 예상으로는 물론 훨씬 개선된 하드웨어를 사용하는 아이폰 11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XR과 동급이거나 더 나은 화질을 보여주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애플로 어서 와. 여긴 처음이지?"
아이폰 X 이후, 아이폰의 가격은 고공행진을 계속했습니다. 고작 4년 전의 사람들에게 "이제 가장 비싼 아이폰이 200만 원이 넘어"라고 하면 무슨 소리냐고 하겠죠. 애플 입장에서는 그만큼 한 번 폰을 사면 오래 쓴다는 논리를 내세우긴 했었는데, 그래도 부담스럽긴 매한가지입니다.
그런 면에서 "부품 떨이 폰"인 SE의 가격은 매력적인 우회로를 제공합니다. 64GB 기준 55만 원($399)부터 시작하는 가격은 아이폰 11의 반값이 조금 넘는 정도이고, 아이폰 11 프로 맥스의 대략 1/3입니다. 특히 요즘같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소비 심리가 얼어붙은 상황에서는 타이밍도 꽤 좋았다고 할만합니다. 거기에 "부품 떨이 폰"이라는 표현은 SE를 비하하기 위해 사용하는 표현인 경우가 많지만, 역으로는 위에서 봤듯이 그만큼 애플 입장에서도, 소비자 입장에서도 익숙한 검증된 기술로 만들어져 신뢰도가 높은 아이폰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최근의 애플은 점점 서비스 매출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앱 스토어에서 나오는 수수료라던가, 아이클라우드의 추가 스토리지 비용, 애플 아케이드나 애플 TV+와 같은 자체 서비스에서 벌어들이는 매출이 대표적입니다. 스마트폰 시장이 고점을 찍은 상황에서, 이런 서비스들이 성공해 애플이 성장을 계속하려면 애플 입장에서는 아이폰 11 시리즈를 대표로 하는 플래그십 라인이 어느 정도 피해를 받는 것을 감수하더라도 저렴한 아이폰을 만들어야 합니다. 전체적인 파이로 봤을 때 아이폰 매출이 줄어들 수도 있지만, 이러한 애플 서비스들은 여전히 아이폰 사용자들에게서 서비스 매출을 얻기 때문이죠. 애플에게는 아이폰의 절대적 판매량보다도 아이폰 사용자 자체의 수를 늘리는 게 더 중요한 셈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폰 SE는 오래된 아이폰을 가지고 있는 기존 사용자들 뿐만 아니라, 안드로이드에서 아이폰으로 바꾸고 싶지만 가격이 부담스러웠던 소비자들에게도 합리적인 가격에 업그레이드 경로를 제공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업그레이드를 통해 애플은 계속해서 서비스 매출을 늘릴 수 있습니다. 추가로, 액세서리 제조사들도 악성 재고로 쌓여가던 아이폰 8 액세서리를 "SE와도 호환" 딱지만 붙여서 그대로 판매할 수도 있습니다.
모두가 윈윈이네요.